베트남 감독 부임 전 꽤 오랫동안 야인 생활을 했던 박항서. 충격적이게도 그가 베트남에서 얻은 첫 직업은 축구 감독이 아니었습니다. “젊고 이기는 강력한 축구를 위해 모든 것을 베트남 축구에 쏟아부을 것이며 한국식 축구 스타일을 공유하는 동시에 차별화하고 팀을 우선시하는 감독의 역할을 할 것이다.” 박항서 감독의 이 말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밝힌 그가 왜 한국을 떠나 베트남행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이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2017년 9월, 2002년의 영광이 기억 속에서 점차 희미해질 무렵 박항서 감독은 아무도 모르게, 심지어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베트남행 비행기에 올랐는데요. 당시 그 어떤 언론도 축구 팬들도 박항서 감독의 근황에 대해 관심이 없었지만, 정식으로 베트남 감독에 부임한 후 믿을 수 없는 기적들을 써 내려가자 한국에서도 점차 그의 행보에 관심을 두기 시작합니다.
2018년 동남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2019 필리핀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내면서 동남아 축구 패권이라는 베트남의 기대에 부응한 것을 넘어 사상 첫 AFC 주관 대회 준우승과 56년 만에 아시안게임 4위, 게다가 사상 첫 아시안컵 3라운드(8강) 진출 및 사상 첫 월드컵 최종 예선 진출 등 베트남 축구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자 박항서 감독의 이름을 외치며 길거리 퍼레이드를 하는 광경들이 엄청난 화제를 모으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애초에 그가 왜 수많은 나라들과 한국에서의 일자리를 두고 베트남에 갔는지, 2002년 수석 코치 자리를 내려놓은 후 무려 15년간 어떤 일들을 했었는지 등 수많은 의문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일각에선 공식적인 그의 발언대로 새로운 도전을 찾아 해외로 떠난 것으로 순진하게 믿고 있지만 실상 그가 베트남행을 선택한 것은 결코 100% 자신의 선택만은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15년의 공백기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분명한 건 그가 한국을 떠나야만 했던 배경에 놀랍게도 홍명보가 있었다는 겁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4년 전, 아직 처참했던 프랑스 월드컵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던 2000년, 차범근 감독의 바통을 이어받은 허정무마저 성적 부진의 이유로 사퇴하자 한국 축구는 지금처럼 갈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박항서 감독은 2000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 정기전에서 감독 대행 자격으로 경기를 지휘했고 이후 자신의 인생과 한국 축구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줄 히딩크호의 수석 코치로 합류하여 2002 4강 신화의 기적을 써 내려가는데요. 전술적인 재능도 뛰어났지만 감독과 선수들 간의 가교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면서 대표팀 선수들이 똘똘 뭉칠 수 있도록 기지를 발휘했고 이후 축협은 그의 성과를 인정하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황선홍이 조별 리그 첫 경기인 폴란드전 때 선취골을 넣고 가장 먼저 안기러 갔던 사람이 박항서이기도 했으며 16강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이 골든골을 넣자 함께 부둥켜안고 눈물을 글썽이는 등 이때까지만 해도 선수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박항서의 인생은 탄탄대로로 풀릴 것만 같았죠. 그런데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히딩크의 계약이 공식 종료되면서 박항서의 입지는 급속도로 좁아지기 시작합니다. 2002년 8월 6일 아시안게임을 약 2달 가량 앞둔 상태에서 축협은 코앞으로 다가온 아시안게임과 2004 아테네 올림픽까지 박항서에게 대표팀 지휘봉을 맡겼는데, 기본적인 계약 내용조차 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연봉 문제로 이견 차를 좁히지 못해 아시안게임까진 일단 무보수로 맡은 뒤 이후 재논의를 하자는 어처구니없는 제안까지 받게 됩니다.
이에 참지 못한 박 감독이 성명을 내자 이에 대한 축협의 반응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9월 남북 축구 대회를 앞두고 방한한 히딩크 감독을 기술고문 자격으로 대표팀 벤치에 앉히는 등 박 감독의 인격조차 무시하는 졸속 행정을 남발했고 이후 성명서를 검토하던 축협 측은 “이들은 협회에 대한 명백한 항명”이라며 박항서를 즉시 퇴출시키기까지 하는데요. 당시 남광호 협회 사무총장은 “대표팀 감독이 협회에 대한 불만을 성명서라는 형식으로 발표한 것은 초유의 일”이라고 비난했고 조중연 전무이사도 “박 감독이 성명을 발표한 것과 관련해 기술위원회를 소집했다”며 “조만간 강력한 결정이 있을 것으로 안다”고 말했습니다. 협회 고위 관계자들의 이 같은 언급은 박 감독에 대한 징계는 물론 감독직 중도 하차까지도 시사하는 것이어서 축구 팬들 사이에서도 “2002년 영웅에게 해도 해도 너무한 처사”라며 비난 여론이 들끓기도 했습니다. 당시 아시안게임 개막이 불과 2주 전이었기에 즉시 사퇴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목표했던 금메달이 아닌 동메달에 그치면서 결국 그는 한국 축구계에서 사실상 퇴출당하는 수모를 겪는데요.
진실은 동메달은 핑계일 뿐 박항서 감독이 비주류 대학 출신인 것과 축협 사이의 불화 때문에 경질된 것이었죠. 축협의 눈 밖에 난 이상 박 감독의 수치스러운 행보는 계속됩니다. 포항 스틸러스에서는 자신보다 후배였던 최순호 감독을 보좌하는 수석 코치로 2년간 부임했고 이후 전남 드래곤즈에서는 갑자기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 수석 코치를 그만두고 부임하는 바람에 기술 고문으로 추락했으며 이마저도 사실상 명예직이었다는 후문이 돌기도 했는데요. 결국 2005년에 고향 팀인 경남 FC의 창단 감독으로 취임했지만, 2년 뒤인 2007 시즌 4위라는 준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구단 프런트와의 갈등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며 다음 행선지였던 상주 상무에서 2010년 간신히 팀을 1부 리그에 승격시킨 후 한국에서의 공식적인 지도자 생활을 마감하게 됩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박항서의 지도자 인생은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요? 모든 건 2005년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부임하면서 시작됐는데요.
이는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홍명보가 가진 지도자 자격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고, 적어도 그가 지도자를 할 생각이었다면 3급 지도자 자격증부터 따야 했습니다. 참고로 3급 지도자 자격증을 따면 유소년이나 초등학교 축구 교실에서 감독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2급 자격증을 따려면 3급을 딴 후 최소 2년이 지나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홍명보에게만큼은 예외 조항이 적용됐습니다. 축협은 국가대표팀에서 A매치 20경기 이상을 소화하거나 K리그 100경기 이상 출전한 베테랑들에 한해서만 3급 지도자 자격증 없이 바로 2급 자격증을 딸 수 있게 했는데, 갑자기 홍명보에게 2급 자격증을 부여하더니, 이후 단 3주 만에 초고속으로 코치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참고로 2급 자격증조차 중학교 내지는 고등학교 팀만 지도할 수 있었으며, 대표팀 지도자로 일하려면 1급 자격증 혹은 아시아축구연맹 A급 자격증이 반드시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홍명보에게 국가대표팀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월드컵을 경험하는 데까지 필요했던 시간은 단 9개월. 자격 논란이 불거진 것은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논란이 거세지자 축협 측은 “지휘권을 갖지 않는 보조 지도자 역할이기 때문에 홍명보 코치의 1급 자격증 취득 여부는 문제 될 것이 없다”는 황당한 논리를 내세웠고, 심지어 2006년 독일 월드컵 16강 진출 실패, 2007 아시안컵 3위 및 음주 파문, 2008 베이징 올림픽 조별리그 탈락 등 대표팀은 실패를 거듭했지만, 홍명보가 책임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참고로 이때 축협은 아시안게임에서 홍명보와 똑같은 성적을 냈던 박항서를 내친 적이 있었습니다. 박항서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U-23 대표팀을 이끌고 3위를 달성했고, 이는 그가 지휘봉을 잡은 지 단 2달 반 만에 낸 성과였습니다. 하지만 박항서는 아시안게임 성적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지휘봉을 내려놓아야 했지만, 축협의 굳건한 신뢰를 받던 홍명보의 행보는 크게 달랐습니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실패에도 불구하고 2012 런던 올림픽 도전 기회를 잡았으며, 그렇게 2012 런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낸 것이 유일한 업적이었습니다. 마땅히 박항서에게 돌아갔어야 할 자리를 꿰찬 홍명보는 결국 2014 브라질 월드컵의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하여 우리가 기억하는 역대급 대참사를 터뜨리게 됩니다. 조별리그 3경기에서 1무 2패로 승점 1점만을 기록하며 소위 ‘광탈’을 해버렸는데, 참고로 한국이 1998 프랑스 월드컵 이후 월드컵 본선에서 1승도 거두지 못한 것은 2014년이 유일했습니다. 그럼에도 축협은 홍명보를 변함없이 신임하며 2015 아시안컵까지 대표팀을 맡아달라고 요구했으나, 축구팬들의 반발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뒤늦게 자진 사퇴하게 됩니다. 애초에 그만한 지도자 그릇이 안 됐으니, 이후 홍명보는 계속 내리막을 걷게 되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던 박항서와 극명하게 갈린 지도자 인생을 살게 됩니다.
홍명보는 2015년 중국 슈퍼리그 항저우 뤼청(杭州绿城)의 감독으로서 처음 프로팀 감독을 맡았으나 2016 시즌 15위를 기록, 팀을 2부 리그로 강등시킨 뒤 도망치듯 자진 사퇴하고 맙니다. 반면, 2년 뒤 베트남으로 자리를 옮긴 박항서 감독은 동남아시아(AFF)컵을 휩쓸며 승승장구했고, 지휘봉을 내려놓은 지금까지도 언론에 회자되는 전설적인 감독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베트남 감독에 처음 부임 당시 박항서 감독은 낯선 베트남 문화에 대한 적응과 선수들의 신임을 받기 위해 직접 선수들의 발을 마사지해주는 등 위계질서가 엄격한 한국 스포츠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장면으로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달리 베트남 현지 언론은 마치 아버지처럼 선수들을 보살피는 박 감독의 지도 방법이 선수들의 잠재력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상반된 분석을 내놓았고, 덧붙여 경기에서 지더라도 고개를 숙이지 말라는 위로를 건네는 모습이 선수들로 하여금 최고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박 감독은 자신은 베트남어는커녕 영어도 못 했기 때문에 선수들에게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스킨십뿐이었다고 밝히며, 직접 몸으로 부딪쳐 감정을 전달하는 원초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뒤늦게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만약 축협이 홍명보에게 보내던 신임의 절반만이라도 박항서를 믿어줬다면, 히딩크호의 산증인인 그의 의지대로 한국 축구는 감히 일본조차 넘보지 못할 강력한 축구 강국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