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2007년 아시안컵 음주 사태. 이운재의 삶은 파괴됐고, 당시 감독이었던 핌 베어벡은 암 판정을 받고 말았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07년 아시안컵. 이 기간은 특정 선수에게 있어 가혹하고도 치욕스러운 해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당시 기자회견장은 장례식 못지않게 침통한 분위기가 흘렀습니다. 이운재는 눈물로 사죄하며 어떤 징계든 달게 받겠다고 밝혔습니다. 조별 예선 바레인전 다음 날이었던 7월 16일, 숙소를 무단이탈해 인도네시아 현지 유흥업소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시인했습니다. 당시 이운재는 바레인전에서 1대2로 패한 뒤 다음 경기를 잘해 8강에 가자는 좋은 취지로 술을 마셨는데 생각이 짧았다며, 팀의 주장으로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징계를 앞둔 심정을 묻자 깊은 한숨을 몰아쉰 뒤 뒤로 돌아앉아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덧붙여 팀에서 가장 모범을 보여야 하는 고참 선수들의 일탈은 아직 2002년의 영광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수많은 축구팬들에게 배신감을 안겼습니다.
사안이 심각함을 깨달은 축구협회는 다음 달 2일 이갑용 부회장 주재로 상벌위원회를 열어 이들에 대한 신속 징계를 결정했고, 대표팀의 명예를 실추한 경우 상벌 규정에 따라 6개월 이상의 자격 정지 혹은 1년 이상의 중징계가 유력했습니다. 최종적인 조사가 끝나고 결국 이운재를 비롯한 동료 선수 3명은 대표팀 자격정지 1년은 물론 KFA에서 주관하는 모든 경기에 3년간 출전할 수 없는 역대급 중징계를 받게 됩니다. 특히 이운재는 당시 10월에 발표됐던 발롱도르 15인의 후보 명단에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지만 징계로 인해 후보 자격마저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조기 사면되어 자연스레 선수 생활로 복귀했으나, 진짜 문제는 당시 감독을 맡고 있던 핌 베어벡이었습니다. 그는 대표팀에서 벌어진 음주 가무 사태와 성적 부진을 이유로 복귀하자마자 즉시 사임을 선언했습니다. 이후 호주 대표팀과 모로코 U-23 및 오만 대표팀 등 몇몇 감독직을 수행했으나, 2019년을 끝으로 그는 축구계를, 그것도 영원히 떠나게 됩니다.
참고로 마지막 오만 대표팀을 맡았을 당시 그는 2019 아랍에미리트 아시안컵에서 조 3위로 16강 진출에 성공시켰고, 토너먼트에 올라간 뒤 이란에게 석패하여 8강 진출엔 실패했지만, 아직 계약 기간은 몇 년 더 남아 있었습니다. 나이도 63세로 그리 많지 않았던 그가 대회 종료 직후 알 수 없는 이유로 감독직 사퇴를 발표했으니 항간에선 그가 나쁜 일에 휘말린 것이 아니냐는 등 여러 루머가 떠돌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그가 더 이상 축구계에서 일할 수 없었던 매우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나고 맙니다. 오래전부터 남몰래 암을 앓고 있었던 그의 병세가 갑자기 재발해버린 것. 결국 그는 투병 끝에 2019년 11월 28일에 운명을 달리했으며 축구협회와 거쳐 간 구단, 선수들, 소속팀에서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도했습니다.
당시 K리그에서는 전광판에 베어벡 전 감독의 영상을 띄우며 잠시 그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고, 특히 베어벡 감독 덕분에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에 데뷔를 했던 울산 현대 수비수 강민수는 “내 지식은 100% 그분께 배운 것이다”라고 말하며 북받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그에겐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갑자기 병세가 악화됐던 것일까? 분명한 건 베어벡 감독은 1981년 이래 여러 프로팀과 국가대표팀 직을 수행해왔지만 길어봐야 3년을 넘지 않았던 것에 반해 한국에서는 2001년 히딩크호에서 처음 코치직을 맡은 이래 2007 아시안컵까지 무려 6년간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가장 열정을 쏟았던 팀이 한국 대표팀인 만큼 이곳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는 사실로 드러납니다. 베어백 감독은 2007년 한국을 반드시 우승시키겠다는 집념하에 밤을 새워가며 전략 구상에 몰두했지만, 음주 가무의 진실을 알고 큰 허탈감에 빠졌다고 합니다.
당시 선수들은 일반 술집도 아닌 현지 유명 룸살롱에 방문해 접대부와 폭탄주를 마시고 놀았으며, 심지어 경기를 이틀 앞두고 새벽까지 시간을 보낸 것도 모자라 2차, 3차까지 나가며 사실상 선수로서의 본분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게다가 해당 업소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유흥 행위까지 하는 업소로 알려진 데다 현지 접대부들이 선수들을 직접 지목하며 한국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한 사진까지 공개되면서 교민들은 부적절한 추문에 커다란 실망감을 드러냈습니다. 더군다나 어린 후배 선수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30대 고참 선수들을 주축으로 벌인 사건임이 드러나자 베어백 감독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을 관리하지 못한 것이 자신의 책임임을 인정하며 불명예에 가깝게 한국 대표팀에서 사임을 결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이 있었으니, 전략 수립 과정에서 당시 코치로 있었던 홍명보와 사사건건 충돌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대표팀의 기강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임에도 베어벡 감독의 독자적인 용병술은 매 경기마다 빛을 발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모든 술자리에 1번도 빠짐없이 참석했던 이천수는 실제로 베어벡 감독의 키플레이어이자 유일하게 밥값을 하는 선수였는데요. 대회 내내 대표팀에서 제일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3위 달성에 수훈갑이 됐고, 때문에 일부 팬들은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천수가 술을 마셨겠냐며 옹호론이 일었을 정도였죠. 사실 베어벡 감독은 역대 감독들 중에서도 유달리 운이 좋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아시안컵 전부터 주력 선수인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등 EPL 3인방이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이탈했고, 박주영은 독일 월드컵 스위스전에서 드러난 피지컬 열세가 리그에서도 두드러져 2006년 시즌부터 큰 폭의 하락세를 타고 있었습니다.
안정환도 수원에 입단했지만, 뒤스부르크와 계약이 끝난 후 반년이 넘는 시간을 무적으로 보낸 탓에 폼이 완전히 떨어져 있었으며, 그나마 믿고 뽑았던 이동국도 미들즈브러에서 최악의 시즌을 보낸 뒤 잠복 부상에 시달려 뛰지도 못하는 등 주전 공격진은 사실상 전멸당한 상태였죠. 이런 상황에서 성적을 내기 위해선 극단적인 수비 축구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득점력은 빈곤했지만, 실점이 불과 6경기 3실점이었기 때문에 꽤나 탄탄한 수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요. 이는 그가 아드보카트 시절에도 정착시키지 못했던 포백으로의 프레임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뤄냈기 때문이며, 적어도 수비 부분에선 아시아 국가 중 가장 탄탄하다고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득점력의 빈곤 때문일까요? 이 과정에서 베어벡 감독은 홍명보로부터 엄청난 견제에 시달리게 됩니다. 당시 베어벡 감독은 선진 축구의 핵심이었던 포백을 어떻게든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쓰리백의 상징과도 같았던 홍명보는 포백 도입에 강력히 반발했다고 합니다.
애초에 히딩크와 아드보카트 감독이 포백 도입에 실패했던 건 홍명보의 존재가 컸습니다. 아드보카트는 한국 국대에 깊숙이 스며든 쓰리백의 잔재를 지워내기가 어려웠다고 토로하면서도 포백 도입이 한국 축구 발전에 필수적이라 판단, K리그 팀 중 유일하게 포백을 쓰는 성남의 전술을 그대로 가져와서 쓰는 식으로 어렵사리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선진 축구의 완벽한 도입과 3위라는 준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음주 파문의 여파가 컸다지만 사실 베어벡 감독의 자진 사퇴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습니다. 베어벡이 사퇴 의사를 처음 밝힌 건 놀랍게도 3~4위 한일전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였다는데요. 그는 한일전 당일 점심식사를 끝낸 후 이영무 기술위원장 등 축협 간부들과 가진 티타임에서 느닷없이 계약을 종료해 달라며 사퇴 이야기를 꺼냈고, 이에 축협 측은 깜짝 놀라며 한국에 돌아가서 이야기하자는 등 만류에 나섰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베어벡은 기자회견에서 사퇴 의사를 독단적으로 공개하기에 이르는데, 심지어 이는 기자들이 묻지도 않은 걸 자신이 먼저 사퇴를 강행한 것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그는 무엇에 쫓겼던 것일까요? 먼저 사면초가인 자신의 상태를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는 걸 절감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는 당초 목표로 내세웠던 아시안컵 4강을 달성했지만, 절망스러운 경기력으로 축구팬들로부터 비난이 쏟아졌으며, 또한 선수 차출을 둘러싸고 K리그 구단과도 극심한 갈등을 빚었습니다. 게다가 사사건건 전술에 훈수를 두는 홍명보를 비롯해 우군이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 버티다간 불명예 퇴진의 멍에를 쓸 수도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음주 파문까지 겹치자 당시 베어벡 감독은 상상하기 어려운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하는데요.
내부에서 들린 소문에 따르면 그는 가족 문제도 편치 않았다고 하는데, 그의 부친은 당시 그리스에서 심장 수술을 받았고, 따라서 당분간 가족을 돌보겠다는 개인적 이유도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다소 충격적인 건 베어벡 감독이 사퇴하자마자 다양한 코치들이 후보군에 오르던 중 뜬금없이 홍명보 대행 체제로 졸속 행정이 나와버렸다는 것인데요.축협 측은 어수선한 팀을 추스르기에 홍명보만 한 대안이 없었다는 걸 근거로 내세웠는데, 그렇게 7년 후 한국 대표팀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역사상 최악의 경기라 할 수 있는 알제리 전 참사를 겪게 되었죠. 목표로 했던 4강 진출을 달성한 베어백 감독은 사퇴 후 돌연 암 투병으로 생을 달리했고, 이천수 등 다른 선수들은 1년 이상의 징계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혼자서만 무사했던 홍명보. 축협의 방패가 이번에도 그를 지켜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