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도 사생활이 더러웠다…” 이선희가 남의 가정 깨고 첩으로 산 충격적인 이유

이선희는 1964년 충남 부령에서 태어났으며, 1984년 재호 강병 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데뷔 당시 이선희는 폭발적인 가창력과 함께 멋진 파마 머리로 화제를 모았다. 그녀는 방송에서 부모님이 자신이 파마한 이유가 방송에서 본인이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고 전하며 당시 유행하던 스타일이라고 밝혔다. 당시 그녀는 정식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했지만, 다른 방송사에서 데뷔한 가수들은 해당 방송사에 출연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고, 이선희는 그 규정을 최초로 깨버린 가수로 알려져 있다. 이선희의 팬들은 이 규정에 대해 반발하며, MBC 출신으로 다양한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며 3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이선희의 인생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운 문제 등은 많은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이선희는 음반 제작자이자 작곡가 겸 기타리스트, 매니저로 일하던 윤희 중시와 1992년에 첫 결혼을 하였고, 1993년에는 딸 윤양원을 낳았다. 그러나 1998년 IMF 금융 위기 당시, 남편 윤희 중의 사업이 무너지며 이선희의 이름으로 된 집까지 경매에 넘어가는 등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합의 이혼을 하였고, 딸은 이선희가 양육하게 되었다. 윤희 중은 재기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결국 1999년 여관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이선희는 당시 콘서트를 준비 중이었는데, 윤희 중의 사망 소식을 듣고 실신하여 병원에 실려가는 등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 이선희는 콘서트에서 “지금 이 순간, 하늘에 계신 분도 저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이 노래를 바칩니다”라며 윤희 중이 작사하고 작곡한 ‘마지막 라이’라는 곡을 부르기도 했다. 이선희의 두 번째 결혼은 정모 씨라는 연상의 사업가와의 결혼이었다. 정모 씨는 이선희보다 아홉 살이 많은 인물로, 그와의 결혼은 당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정모 씨는 서울 양재동에서 건축 연구소를 운영하며 교수직을 겸임하고 있었고, 재력가로서 미국을 오가며 자유롭게 활동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모 씨의 전처가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전처는 정모 씨가 결혼 중에도 다른 여자를 만나며, 이선희는 그의 네 번째 부인이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이로 인해 이선희는 큰 논란에 휘말리게 되었고, 결국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리고 팬카페를 통해 재혼 소식을 전했다. 이선희는 남편이 연예인이 아니어서 사생활이 공개되는 것에 부담을 느꼈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결혼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선희는 대혼 14년 만에 또다시 이혼을 발표하게 된다. 소속사는 전 남편이 해외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며 별거 상태였다고 설명했고, 이선희와의 성격 차이가 이혼 사유라고 밝혔다. 이선희의 두 번째 결혼과 이혼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선희의 삶은 항상 그 자체로 큰 화제를 몰고 다녔고, 그녀의 결혼 생활 또한 팬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Leave a Comment

5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