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미는 1940년 7월 대전에서 태어났으며, 8남매 중 일곱 번째로 자랐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한 그녀는 본명이 김명자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여배우 중 한 명입니다. 김지미는 남성 편력과 눈에 띄는 미모로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유명한 인물이었고, 연예계에서 주목받는 여배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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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여고 시절, 친척 언니가 운영하던 명동 백조다방에서 김기영 감독에게 우연히 발탁되며 영화계에 입문했습니다. 1957년,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황혼 열차』로 영화계에 데뷔했으며, 당시 잘 나가던 선배 최현이와 경쟁을 벌였지만, 1960년대 후반에는 최현이, 문정숙, 최지희 등 다른 여배우들을 제치고 당당히 탑 여배우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김지미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1958년, 18살의 어린 나이에 12살 연상의 영화 감독 홍성기와 결혼했으나, 결혼 후 급격히 바빠진 김지미의 일상과 홍성기의 감독 업무로 인해 갈등이 생기고 결국 1962년에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이혼의 원인 중 하나는 김지미와 배우 최무룡과의 간통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김지미와 최무룡은 함께 일하는 영화사에서 가까워졌고, 결국 불륜 관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공개되어 큰 논란을 일으켰고, 김지미는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이 사건으로 인해 집을 팔고 위자료를 지불하며, 약 두 달 뒤 최무룡과 재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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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룡과의 결혼생활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과 아들이 있었으나, 아들은 돌이 지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경제적 어려움과 최무룡의 영화 제작 실패로 인해 1969년에는 또 다시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이혼 후 최무룡은 ‘사랑에서 헤어진다는 우품 말’이라는 유행어를 남기며, 김지미는 그와의 결혼생활에서 여러 가지 아픈 경험을 했습니다.
그녀는 1976년, 또 다시 큰 스캔들을 일으켰습니다. 이번에는 11살 연하의 가수 나훈나와의 관계가 공개된 것입니다. 당시 연상연하 커플이 드물었던 시절, 김지미와 나훈나는 몇 년 간 동거했으나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동거 기간 동안 김지미는 나훈나에게 예절과 서예 등을 가르쳤고, 나훈나는 김지미를 두고 ‘나를 남자로 만들어 준 여자’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국 서로의 꿈과 삶의 방식 차이로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나훈나는 김지미에게 위자료로 수천만 원을 주었고, 이후 14살 연하의 여가수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김지미는 이후 1991년에 네 번째 남편인 의사 종구를 만났습니다. 종구는 캐나다에서 심장 전문의로 활동하다가 한국에 돌아와 개업한 의사였으며, 김지미는 그와 결혼하여 11년 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결혼 생활은 11년 만에 끝이 났고, 김지미는 이 결혼에 대해 후회하는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김지미는 2002년부터 미국 LA에서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으며, 손주들과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네 번의 결혼과 이혼을 거치며, 그녀는 ‘남자는 다 어린애’라고 말하며, 나이와 상관없이 남자와의 관계에서 느낀 불안정함을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결혼과 이혼을 통해 삶의 진리를 깨달았으며, 지금까지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한 적이 없다고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