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니가 이렇게 나를 배신할수가있어…” 유상철이 숨겨왔던 아시안컵 승부조작의 충격적인 진실

23년간 감춰진 홍명보의 어두운 이면이 드러났다. 이를 세상에 처음 드러낸 주인공은 다름 아닌 고인이 된 유상철이었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기 전까지 한국 축구의 발전을 가로막고 재능 있는 선수들을 썩어가게 만든 폐단이 세상에 드러날 때마다 항상 축구 팬들의 입방아에 오른 단어는 ‘인맥 축구’였습니다. 흔히 알려진 바로 이들의 정체는 고려대 출신끼리의 파벌로 이뤄졌으며 그 외 다른 학벌을 가진 선수들은 제아무리 훌륭한 재능을 갖고 있어도 결코 대표팀에 발탁되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충격적이게도 이번 홍명보 사태로 드러난 진실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고려대 인맥 축구의 규모와 조직력, 그리고 그 목적은 단순히 축구를 위해 탄생된 수준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1993년 전·현직 축구 선수들은 유소년 축구 지원과 봉사활동을 위해 의문의 소규모 단체를 조직합니다. 분명 첫 시작은 좋은 의도였으나 규모가 커질수록 점차 알 수 없는 소문에 휩싸이는데요.

이 소름 끼치는 축구 조직의 이름은 바로 ‘열하나회’. 애초에 해당 조직이 23년간 비밀리에 활동이 가능했던 이유는 회원을 받는 가입 조건과 절차가 까다롭고 잃을 게 많은 유명 선수들 위주로만 가입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모임을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문제의 홍명보였죠. 23년 전인 1993년 홍명보를 초대 회장으로 황선홍, 김정혁, 윤정환, 김판근 등 스타플레이어 11명으로 출범한 열하나회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최초의 목적에서 벗어나 일부 스타플레이어들만의 배타적인 모임으로 변해갑니다. 이를 가장 정확히 보여줬던 증거가 모임에 가입시키는 회원 수가 1년에 한두 명뿐이었으며 그들의 개인적인 배경과 사상 및 종교 등 모든 면에서 유독 까다로운 절차를 진행했다는 것인데요. 심지어 2년 뒤 회원 수가 20명으로 늘어나자 나중엔 신규 회원을 받기 위해선 기존 회원 중 3분의 2의 찬성표를 받아야만 겨우 심사 대상에 오를 정도였습니다. 비밀 조직 같던 열하나회가 처음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건 하나의 작은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열하나회에 속했던 선수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먼저 여러 프로팀 감독들과 크고 작은 갈등을 빚었다는 것이고, 심지어 프로팀을 넘어 국가대표팀 차출 프로세스도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는 것인데요. 축구인들 사이에서 우려가 커지자 이 조직을 대상으로 저항 세력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1995년 한국은 코리아컵 준결승전에서 예선에서 쉽게 승리했던 잠비아에 패하고 맙니다. 그런데 박종환 감독의 억압적이고 비인격적인 훈련에 불만을 품고 있던 홍명보가 경기 전날 술집에서 대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며 난리가 나는데요. 처음엔 시민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프로 선수들이 그것도 국가에서 지원을 받는 선수들이 음주가무에 빠져 형편없는 경기를 치렀을 리 없고, 당시 언론들도 이들을 두둔하듯 음모론으로 치부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인데요. 그런데 실제 리스트에 오른 선수들의 음주를 목격했던 시민들의 제보가 쏟아지며 모든 게 사실로 밝혀지자 홍명보와 함께 술자리에 있던 선수들은 징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에 홍명보는 음주 사건의 제보자로 박 감독을 꼽았고 언젠가 앙갚음하리라 맹세했다고 하는데요. 이들은 경기 전후 인터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박종환 감독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으며 결국 1983년 멕시코 청소년 축구대회 4강 진출 업적에도 불구하고 열하나회와의 불화가 원인이 되어 박종환 감독은 1996년까지도 프로 코치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게 됩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해 아시안컵 8강 이란전에서 한국은 2대6으로 참패하는데 이는 축구 역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특히 전반 2 대 1로 앞서던 중 휴식 시간 라커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후반에만 연속으로 5골을 먹은 것으로, 당사자들은 부인하지만 이 사건은 축구계뿐만 아니라 축구 팬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는 경기였죠. 당시 박종환은 결국 감독에서 물러났고 당시를 회상하며 “나쁜 생각까지 했을 만큼 개인적으로도 충격이 컸다”고 하는데요.

이때부터 축협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한 열하나회는 한국 축구 협회를 주무르며 자신들의 파벌이 아닌 축구인들을 물어뜯기 시작합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도전한 차범근호가 네덜란드전에서 참패하자 열하나회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먹잇감으로 삼게 됩니다. 당시 차범근 감독은 아직 벨기에전이 남아 있었지만 경기 결과에 관계없이 16강 진출이 좌절됐다는 이유로 열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축협의 집중 포화를 얻어맞는데요. 언론도 가세하여 벨기에전이 시작되기 전 그를 감독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됐고 전후 상황을 아무것도 몰랐던 팬들도 차범근 감독을 역적 취급하기 시작합니다. 열하나회의 도 넘은 인신공격에 모든 축구인들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랐고 심지어 열하나회에 속해 있지 않은 선수들조차 분위기에 휩쓸려 차범근을 보이콧 했지만, 이때 단 한 선수 만큼은 끝까지 감독을 신뢰하며 결국 그런 믿음에 보답하게 됩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유상철이었습니다.

벨기에에 끌려가던 후반 27분, 하석주가 중원 왼쪽에서 얻은 프리킥을 골 에어리어 부근으로 빠르게 올리자 유상철은 마치 미끄러지는 듯한 슬라이딩 동작으로 발을 갖다 대는 데 성공, 자신의 월드컵 첫 골이자 1대1 무승부의 결정타를 날렸습니다. 열세의 전력으로도 3패 탈락 및 대회 최하위만큼은 반드시 면해야 한다는 각오로 죽을 힘을 다해 뛴 한국 대표팀의 모습이 어찌나 처절했던지, 지난 네덜란드전 참패에도 불구하고 축구팬들은 유상철의 골에 너나 할 것 없이 울부짖었고, 이는 추락하던 대표팀에 대한 여론을 한 번에 바꿔버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차범근에 대한 비난 여론이 잠잠해지자, 열등감의 중심 인물이었던 홍명보는 유상철을 아니꼽게 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수면 위로 드러났던 것이 월드컵 4강 신화 직후였습니다. 홍명보는 독일전 어이없는 실점과 함께 본인의 실수로 시작하자마자 실점하고 패배한 3~4위 터키전 패배의 책임을 유상철에게 돌리는 등 유체이탈 화법으로 논란이 될 뻔했으나, 운 좋게도 역대급 성적에 온 국민이 들떠 있던 터라 큰 이슈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참고로 유상철은 건국대 출신으로 애초에 열등감에 가입할 자격조차 없었던 선수였지만, 오직 실력 하나만으로 대표팀에 승선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히딩크는 완전히 바꿔놓은 한국 축구가 다시 인맥과 연줄에 의해 망가지는 것을 극도로 우려하고 있었으며, 히딩크의 가르침대로 실력이 인정받는 토대를 위해 여러 남모를 싸움을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유상철은 히딩크의 퇴임 이후 한국 축구에 고질병이 되살아나려 하자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지도하는 외국인 감독을 원한다”며 언론과 인터뷰했고, 이에 홍명보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자 전 대한축구협회 회장이기도 했던 조중연은 “홍명보가 선수로서의 본분을 망각한 것 같다. 옛날에는 감독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다”고 개탄하기도 했습니다. 히딩크 사건 후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다면 다수의 해외파가 생겼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우물 안 개구리였던 열등감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과거 열등감이 고려대 출신과 비고려대 출신 간 이간질을 했다면, 이후 열등감은 해외파와 비해외파로 극명하게 갈리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후 열등감과 싸워나가던 유상철의 계보도 자연스레 후배에게 그 바통이 넘어가게 됩니다.

당시 이를 저격한 인물은 기성용으로, 그는 대표팀 내 파벌 문제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으며 오히려 해외파의 존재 때문에 학벌로 인한 명문대파와 비명문대파 간의 틈새가 꽤나 벌어지게 됐다며 홍명보에 관한 충격적인 제보를 하기에 이릅니다. 더 큰 문제는 열등감이 팀의 단결력을 망가뜨리는 파벌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과 별개로 사실상 음주와 유흥 모임으로까지 전이되며 선수들의 기강 자체를 흐트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 모임이 존재하는 23년 동안 그들은 항상 술 모임이 문제가 됐는데, 2007년 아시안컵 기간 중 음주로 물의를 일으킨 이운재와 우성용이 당시 기자회견 중 눈물로 사죄하기도 했으며,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광탈 후에는 홍명보 감독의 주도하에 현지 접대부까지 끼고 파티를 벌이다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유상철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 홍명보가 감독으로 선임됐을 때 우려를 나타내면서도 “홍 감독은 카리스마가 있으므로 선수단을 장악하고 잘 조율할 것이다. 대표팀에는 해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도 많기 때문에 이 부분만 잘 이뤄진다면 브라질에서 좋은 성적도 가능할 것이다. 또한 그는 나름대로 전술에 대해 구상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코칭 스태프들과 미팅을 하면서 문제점을 보완할 것으로 본다”며 응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 같은 기대를 단번에 박살 낸 것도 모자라 열등감의 고질병이었던 음주 파티로 또 문제를 일으켰으니, 이에 극도로 실망한 유상철은 해당 사건을 계기로 사실상 대표팀과 담을 쌓고 오직 K리그에만 열중하던 중 암 투병으로 조용히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한국 축구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보낸 것과 반대로 한국 축구의 폐단을 주도했던 양면적인 인물 홍명보. 과연 그가 다시 감독으로 복귀한 지금, 만약 유상철 님이 살아계셨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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