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한국의 헤비메탈 신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백두산의 프론트맨이자 보컬리스트인 유현상 씨의 활약은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故) 신해철 씨 역시 학생 시절 백두산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이 그룹은 그 시기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이 데뷔하자마자 KBS 가요대상 그룹 부문 후보에 오른 것은 그들의 인기를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80년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인물 중 하나는 수영 선수 최윤희 씨였습니다. 그녀는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3관왕,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2관왕을 차지하며 한국 수영의 역사에 길이 남을 성과를 달성했습니다. 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선수였던 그녀는 ‘인어공주’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최윤희 씨는 뛰어난 수영 실력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외모로도 주목받으며 성공적인 운동 경력과 매력을 자랑했습니다. 19살에 은퇴한 후에도 방송 MC와 광고 모델로 활동하며 주목받았고 몇몇 스캔들과 화제의 중심에도 섰습니다. 그녀의 활약은 여타 연예인들을 넘어서는 관심을 받았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유현상 씨와 최윤희 씨의 운명은 엮이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KBS 계단에서 처음 만났으며, 최윤희 씨는 유현상 씨에게 항상 아름답게 인사하며 그의 호감을 얻었습니다. 그녀의 겸손한 태도는 유현상 씨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느 날 지인과 함께 식사하던 중에 최윤희 씨와 마주친 유현상 씨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그녀가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언급했습니다.
이후 최은희라는 예명으로 활동 중이던 최윤희 씨를 연습실로 초청한 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실제로 만나 사랑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돌이켜 보면 이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데이트를 시작한 이후 최윤희 씨는 자신의 꿈속에 유현상 씨가 매일같이 등장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운명적인 끌림이 있다고 느끼게 되었고, 이 만남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했습니다. 유현상 씨는 4살 때부터 수영에 몰두해 온 최윤희 씨를 어린 시절부터 지지하고 그의 열정을 인정해 왔습니다. 유현상 씨는 최윤희 씨를 수산시장까지 데려가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최윤희 씨는 유현상 씨가 자신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되어 국민적인 스포츠 스타로 자리매김한 유현상 씨에게 최윤희 씨가 매료되어 비밀리에 사랑을 키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길은 커다란 장애와 마주하게 됩니다. 최윤희 씨의 어머니는 딸의 연애사에 강하게 반대했으며, 유현상 씨가 어머니를 만났을 때 어머니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유현상 씨는 최윤희 씨의 어머니에게 거의 인정받지 못했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는 최윤희 씨의 모습은 유현상 씨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러한 반대와 압력 속에서 최윤희 씨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이에 더해 그녀는 단식까지 하며 반항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현상 씨는 최윤희 씨와 계속해서 함께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한때 이 관계를 끝내려고 마음먹기도 했지만, 결국 그 생각을 접었습니다.
어느 날 혼자서 미술관을 찾았을 때 우연히 최윤희 씨와 재회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그녀와 결별하지 않기로 하고 결혼을 결심하게 됩니다. 1991년 6월 1일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했고, 그로부터 단 5일 후인 6월 6일에는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최윤희 씨는 학원에 간다는 거짓말로 부모님을 속이고 결혼식장으로 향했으며, 이는 그녀가 가정을 떠나 결혼 생활을 선택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처가를 찾았을 때 유현상 씨는 장모로부터 차가운 반응을 받았습니다. 장모는 유현상 씨를 외면하며 등을 돌렸고, 그와의 관계를 단호히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전환되었습니다. 동균 군이라는 아들이 태어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장모는 동균 군을 품에 안고 유현상 씨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며 두 사람 사이의 불화를 해소했습니다. 그 후 장모는 최윤희 씨의 아이들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고, 유현상 씨에 대한 마음도 서서히 녹아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행복도 잠시, 2001년 최윤희 씨는 미국에서의 수석 코치 기회를 잡고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유현상 씨는 그 후로 이십 년간 한국에서 혼자 기러기 아빠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최근 유현상 씨는 MBN의 ‘속풀이쇼 동치미’에 출연해 이 모든 경험을 공개했습니다. 그는 지난 20년간 아이들의 학비와 생활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 너무나도 부당하다고 밝혔습니다.
결혼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음악 활동을 포기하고 ‘여자야’라는 트로트 곡을 부른 것이 백두산의 팬들로부터 배신감을 사기도 했지만, 그의 헌신 덕분에 가족에게 좋은 것을 제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도 유현상 씨는 아내 최윤희 씨와의 교류를 지속하면서 노래와 행사를 통해 자금을 모아 아이들을 돌보는 데 애썼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혼자 식사를 하며 고된 시기를 혼자 힘으로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6년 최윤희 씨가 돌아오면서 유현상 씨는 기러기 아빠 생활을 접고 아내와 함께 생활하기를 기대했으나, 그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최윤희 씨가 한국 여성 스포츠의 리더로 선출되고 문화체육관광부의 차관직까지 맡으면서 그녀의 바쁜 일정은 유현상 씨에게 집안일을 정리하는 역할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모든 정리와 조정의 책임은 유현상 씨에게 주어졌습니다. 놀랍게도 유현상 씨는 서류를 파쇄하는 데 바쁘다며 “인간 파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최윤희 씨는 감사의 말 한마디조차 전하지 않았습니다. 유현상 씨는 이제 급여를 받게 되었으니 자신의 고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최윤희 씨는 자신의 급여는 스스로 관리하며 차관으로 승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돈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유현상 씨가 이러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으나, 사실상 내용은 충격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대중은 최윤희 씨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유현상 씨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않은 태도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심지어 유현상 씨는 방송에서 최윤희 씨에게 “내가 준 돈은 어디 갔냐”고 물어보고 싶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패널들은 “아이들의 학비를 부모가 지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이에 대해 묻는 것을 적절치 않다고 말렸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유현상 씨에게 비웃음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패널들이 이렇게 부정적으로 반응했지만, 유현상 씨는 만약 최윤희 씨가 경제적으로 독립적으로 행동했다면, 경제적인 측면에서 질문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현상 씨는 ‘동치미’의 분위기에서 자신의 고민을 공유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를 품었을 것입니다.
최윤희 씨가 미국에서 수석 코치로 활약할 기회를 얻고 가족과 함께 떠난 후에도 유현상 씨는 노래와 공연 등을 통해 아이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했습니다. 2016년 최윤희 씨가 돌아온 후 유현상 씨는 기러기 아빠의 역할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최윤희 씨가 한국 여성 스포츠계와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으로 활약하면서 유현상 씨는 가정에서의 책임을 더욱 강하게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 점점 더 부각되고 있으며, 연예계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종종 발생하고 있습니다. 정용진 씨와 권상우 씨도 자녀를 해외로 보내는 등의 기러기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손태영 씨가 현재 뉴욕에서 자녀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하지만 이와 동시에 기러기 아빠로서 겪는 고충은 상당히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 벌써 27년째 기러기 아빠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코미디언 김혜영 씨의 사연이 있습니다.
방송 활동은 이제 없지만, 자녀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계속하기 위해 작은 상점을 운영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지요. 그러나 미국에서 만난 자신을 멀리하는 딸을 보며 충격을 받았고, 자신이 단지 경제적 지원만을 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이런 사연을 접하시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기러기 아빠로 살아가는 것은 각 가정의 특수한 상황과 결정에 따라 다릅니다. 이를 외부에서 비판하거나 평가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기러기 아빠가 되는 것이 쉬운 선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