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거 때문에 그런거 였어요…?” 안세영 배신해버린 현정화의 숨겨진 남편의 충격적인 정체

안세영의 폭로에 대해 많은 스포츠 선배들이 하나둘씩 나서고 있는데, 배드민턴 계 선배들이 가만히 있지 못할 망정 안세영을 저격하는 행동을 하며 많은 이들의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하지만 스포츠 레전드 스타 현정화가 나서며 사태가 급변하는 느낌입니다.

현정화는 안세영을 보며 “그냥 파워풀한 게 아니라 근성이 있고 점수를 하나도 안 버리고 역전하는 모습을 보면 대단하다는 느낌이 든다”며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 마음에서 올라오는 선수가 돼야 한다. 그런 게 아니면 한 종목에서 1등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엄청난 칭찬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현정화는 “국가대표를 하기 위해 태어난 선수”, “냉혹한 승부사”, “한국 탁구의 자존심”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역대급 선수입니다.

현정화는 안세영 이전에 신동으로 통하던 선수로 유명했습니다. 부산 수정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던 중 학교에서 아이들이 뽀얀 공을 치며 놀았고, 그게 어찌나 재밌어 보이던지 현정화는 수시로 가서 창문에 매달려 기웃거렸습니다. 그러다가 공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주워다 주곤 했습니다. 지독히 관심을 보이는 꼬맹이가 재밌었는지 하루는 선생님이 들어와서 쳐보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그게 무슨 놀이인지 몰랐다고 하죠. 그 무렵 학교에서 각 반 릴레이 선수들을 대상으로 탁구 부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렸고, 현정화는 지체 없이 손을 들어 마침내 라켓을 잡게 되었습니다.

현정화는 “하다 보니 재미도 있고 욕심도 나고 지니까 화도 나고 그렇게 하염없이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처음엔 10명이 넘던 부원이 6개월 지나자 반으로 줄고 6학년 되니 달랑 여섯 명만 남았는데, 그중에서도 현정화는 독보적이었습니다. 이런 자신의 승부 근성에 대해 “제가 생각해도 승부 근성이 대단했던 것 같아요. 지고 나면 속에서 불이 나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연습 게임에서 져도 저쪽에 가서 앉아 울었으니까요. 분해서”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현정화는 원래 뼈도 가늘고 약해 파워가 없었는데, 온종일 경기를 뛰는 탁구는 파워, 스피드, 순발력, 지구력 모두 갖춰야 하기에 어금니 깨물고 오로지 근성으로 버텨낸 것이었죠. 그나마 들소 같은 먹성을 가졌던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어머니가 “너를 키우니 소 한 마리 키우겠다”고 얘기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막 중학교 2학년이 됐을 무렵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현정화의 아버지도 탁구 선수 출신이었고 몸이 안 좋아 늘 힘겨워하셨다고 합니다. 현정화가 초등학교 시절 경기를 하는데 갑자기 벤츠에서 아버지가 소리를 지르며 이것저것 지적해 주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가 탁구 선수였고, 박성인 빙상연맹 회장 등과는 친구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고 합니다. 현정화의 아버지는 친구들에게 탁구 선수 딸내미 자랑을 곧잘 하셨고, 아저씨들은 “아버지와 공 치는 게 너무 닮았다”며 감탄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현정화가 탁구를 하는 것에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맨 처음 탁구를 한다고 했을 때부터 줄곧 그랬죠. 정말 도시락 싸 가지고 따라다니며 말렸어요. 전국에서 1등을 하는데도 말이에요. 공부를 곧잘 했던 딸이 그냥 남들처럼 살았으면 했던 것 같아요”라며 현정화는 그 시절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반대는 중3 때까지 이어지다가 영국에서 열린 세계 주니어 오픈 선수권 대회에서 단식, 복식, 혼합복식, 단체전에서 메달을 따고 4관왕을 하고 나서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현정화는 1991년 4월 24일 최초의 남북 단일팀 ‘코리아’의 일원이 되어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지금은 믿기 힘든 남북 단일팀이 결성되게 된 계기는 분단 국가였던 서독과 동독의 올림픽 단일팀 구성이었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분단 국가였던 남측과 북측에도 단일팀을 제안한 것입니다. 남북은 단일팀 논의를 위해 회담을 열긴 했지만 선수 구성 문제와 북측이 팀 이름에 꼭 ‘조선’을 넣어야 할 것을 주장하는 등의 이유로 단일팀은 성사되지 못하고 끝났죠. 1989년 제35회 평양 세계탁구선수권을 앞두고 남북은 다시 단일팀 구성을 논의했지만 불발됐습니다. 하지만 남북의 단일팀 논의는 지속적으로 진행됐고 1991년 비로소 남북이 합의해 한반도 사상 최초 남북 단일팀 ‘코리아’를 결성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판문점에서 만난 남북 인사들은 30여 분 만에 합의를 이뤄냈다고 합니다.

분단 46년 만에 남북의 선수들은 하나가 돼 1991년 4월 24일 남북의 국기가 아닌 한반도가 새겨진 마크를 유니폼에 달고 출전했고, 팀 코리아는 남녀 선수단 14명이었습니다. 46년의 단절된 세월은 남북 단일팀에 고스란히 나타났고, 우선 북측의 탁구 용어가 서로 너무나도 달랐다고 합니다. 기존에 사용하던 ‘서브’는 북측에서 ‘쳐 넣기’, ‘스매싱’은 ‘때려 넣기’ 등 용어 등에 혼선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의사소통의 문제가 생겨 훈련에 차질이 생겼죠. 더군다나 남북은 혹시 모를 사태와 선수들을 감시하기 위해 각각 국가안전기획부 요원과 보위부 요원들을 파견했고, 때문에 남북 단일팀은 왠지 모를 긴장감 속에 훈련을 진행해야 했습니다.

이런 여러 악조건에서도 한국의 현정화, 홍차옥, 북한의 리분희, 유순복으로 구성된 여자 단일팀의 활약은 눈부셨습니다. 첫 경기 프랑스를 상대로 현정화와 리분희가 복식에 나서 3대 0 승리로 승전보를 올렸고, 이후 복식 7전 7승을 기록하며 단숨에 결승에 올랐죠. 그러나 결승전 상대는 세계 탁구 최강 중국이었습니다. 남북 단일팀은 만리장성을 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으로 여겨졌는데, 중국은 1975년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서부터 8연속 우승을 했던 팀이었고, 특히 이때 중국의 탁구 천재이자 통칭 ‘마녀’라 불린 덩야핑이 팀 코리아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승부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설상가상 북측 핵심 선수인 리분희가 몸 상태 저하로 단식 경기를 포기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리분희는 복식 경기에 집중하고 대타로 팀의 막내 21세 유순복이 덩야핑 상대로 경기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은 사실상 버리는 카드였던 유순복이 기적을 만들어낸 것인데, 최강 덩야핑 상대로 총 스코어 2대 1로 승리를 거뒀기에 난리가 났었죠. 두 번째 경기에 나선 현정화가 중국 가오쥔 상대로 승리하며 우승까지 한 경기만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세 번째 경기는 복식으로 현정화와 리분희가 나섰으나 결사 항전하는 중국 팀에게 석패하며 고비를 넘지 못하고 패배했습니다.

그렇게 경기는 마지막 다섯 번째 경기로 넘어갔고, 다시 막내 유순복이 가오쥔을 상대했습니다. 1세트를 먼저 가져간 유순복, 2세트에서 13대 17로 밀리고 있었으나 기적처럼 네 점 차를 따라붙은 후 기어이 역전승을 만들어내며 팀 코리아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이었습니다. 경기 종료 후 시상식엔 한반도기가 올라갔고 애국가 대신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타국에서도 우리나라 역사에도 오래 남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여자 단체전 우승으로 극적인 마무리까지 한 그 대회의 주인공은 남측의 현정화와 북측의 리분희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여기서 또 재밌는 비하인드가 있습니다. 일단 양측은 맞대결 부담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즐거웠다고 하는데, 한국의 경우 “북한 선수를 다 빼고 중국에 맥없이 금메달 넘겨주는 게 순서다” 싶었으니까, 양측 모두 큰 고비 하나를 넘긴 데다 힘까지 합쳤으니 중국을 꺾은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던 건데요. 금메달을 목에 건 그날 밤 현정화는 당돌한 잠입을 감행했는데, 바로 “언니, 언니” 하며 따랐던 한 살 위 리분희 방으로 몰래 간 것이죠. 한 팀이라고 하지만 양측의 감시 속에 남측은 호텔 5층, 북측은 6층에 묵고 있었는데, 짐을 꾸리다 말고 한국에서 준비해 간 물건들을 챙겨 6층으로 올라가 잠입에 성공했고, 거기서 새벽 4시까지 수다를 떨며 놀았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둘은 남북 탁구 자매로서 정을 확인하고 현정화는 준비해 간 선물도 주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금반지를 내밀었더니 극구 사양하는 거예요. 한국에서 마음먹고 준비해 간 거였거든요. 제 이름까지 새겨서…” 사실 현정화가 내민 금반지는 선뜻 받기 어려웠던 게, 당시 북측은 남측 관계자들과의 개별 접촉을 전면 금지한 상황이라 금반지를 지녔다 행여 감시원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곤욕을 치르게 돼 있었으니, 리분희가 손사래를 치는 것도 무리는 아닌 상황이었는데요. 하지만 현정화는 기어이 리분희의 손에 금반지를 쥐어주고 나왔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그 기억은 좋은 시절로 남아 있는데요.

현정화는 같은 탁구 선수 남편과 결혼하며 가정을 꾸렸는데, 현정화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한다고 다 데리고 나갔는데 막상 가니 욕심이 생겨서 눈 딱 감고 미국의 집을 샀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정화 대신 아이들과 남편이 미국에 남기로 결정한 것인데요. 그게 무려 12년이나 됐다고 합니다. 현정화의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때 미국은 급식이 없어서 도시락을 싸 가든지 거기서 피자를 사 먹든지 해야 했는데, 남편은 아이들을 위해 매일 도시락을 싸 줬고 집에서 김치도 담근다고 하는데요. 심지어는 백김치를 담아서 지인들에게 나눠 줄 정도로 가정적인 남편이지만, 이제는 미국을 너무 사랑해 아예 한국으로 들어오지 않으려고 한다는데요. 타국에서 독보적인 스타가 되어 코치, 해설까지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는 물론 방송에도 출연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준 현정화가 안쓰럽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안세영의 롤모델이 현정화일지도 모르겠는데, 안세영은 외부 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운동에만 전념하길 원합니다. 이건 안세영이 국제 배드민턴 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한다면 무리가 아닌데요. 다만 배드민턴 협회가 안세영의 개인 후원을 허용한다면, 현재 후원사 요넥스가 배드민턴 협회에 후원하는 비용을 대폭 삭감할 것이 당연하고, 그럴 경우 협회의 재정이 크게 줄어 제2의 안세영을 키워내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죠. 그렇다고 협회가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한 안세영의 개인 후원을 제한하는 것도 무리이며, 여론 역시 안세영 편입니다. 협회가 안세영에게 조건부로 개인 후원 계약을 풀어주는 등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안세영은 “지금부터는 협회 관계자들이 변화의 키를 쥐고 있는 만큼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행동해 달라”며 마지막으로 말을 남겼는데요. 합리적인 시스템 아래에서 선수가 운동에만 전념하며 좋은 경기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더 나아지는 배드민턴 협회가 되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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